의정부지방법원 2006. 2. 1. 선고 2004가합7887 판결 [소유권확인]
판시사항
참조조문
참조판례
심판대상조문
판례내용
- 원고
-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양주시 회암동 4 대표자 주지 ○ ○ ○ 소송대리인 변호사 서현
- 피고
- 1. 대한민국 송달장소 대전 서구 선사로 139 정부대전청사 1동 10층 기획예산법무담당관실 법률상 대표자 법무부 장관 천정배 소송대리인 변호사 정주교 2. 양주시 양주시 남방동 1-1 양주시청 대표자 시장 임충빈 소송대리인 변호사 유정용 변론 종결 2005. 12. 14.
- 판결 선고
- 2006. 2. 1.
1. 이 사건 소 중 피고 양주시에 대한 부분 및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별지1목록 기재 1 물건에 대한 부분을 각 각하한다.
2. 원고와 피고 대한민국 사이에 있어서,
가.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18, 19, 20 지상에 소재한 별지1목록 기재 2 내지 5 물건이 원고의 소유임을 확인한다.
나.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18, 20 지하에서 발굴된 별지2목록 기재 물건이 원고의 소유임을 확인한다.
3. 소송비용 중 원고와 피고 양주시 사이에 생긴 부분은 원고가 부담하고, 원고와 피고 대한민국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 대한민국이 부담한다.
원고와 피고들 사이에 있어서,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18, 19, 20 지상에 소재한 별지1목록 기재 물건 및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18, 20 지하에서 발굴된 별지2목록 기재 물건이 원고의 소유임을 확인한다.
1. 기초사실
가. 원고는 전통사찰보존법에 의하여 등록된 전통 사찰로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18 전 11,498㎡, 19 임야 198㎡, 20 전 565㎡(이하 '이 사건 사찰부지'라고 한다) 토지를 경내지로 소유하고 있다.
나. 피고 대한민국은 1998년 1차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천보산 일대에서 고려 말기에서 조선 중기까지 왕실 사찰로 번성하였던 회암사(이하 '구 회암사'라고 한다) 유물에 대한 발굴을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구 회암사지 터는 국가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건 사찰부지도 위 발굴지에 포함되어 있으며, 피고 대한민국은 4, 5, 6차 발굴 작업(1, 2, 3차 발굴 작업은 구 회암사지 터 중 이 사건 사찰 부지가 아닌 국가, 개인 소유 토지를 발굴한 것이다)을 통해 별지1목록 기재 물건(이하 '이 사건 제1 문화재'라고 한다) 및 별지2목록 기재 물건(이하 '이 사건 제2 문화재'라고 하며, 이 사건 제1, 2 문화재를 모두 지칭할 때는 '이 사건 문화재'라고 한다)을 발굴하였다. 피고 대한민국은 이 사건 제2 문화재 중 1 내지 30 기재 물건의 소유자가 판명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에 관하여 문화재보호법 제48조에 의해 국가 귀속처분을 하였고, 나머지 물건에 관하여는 아직 국가 귀속처분을 하지 아니하였다.
다. 원고는 피고들에게 이 사건 사찰부지에 대한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로 지속적으로 이 사건 문화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피고들 중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문화재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이 사건 사찰부지에 대하여도 수용할 의사를 밝혔다. [인정근거 : 다툼 없는 사실, 갑 제1, 2, 9, 11 내지 27호증, 을 제1호증, 변론 전체의 취지]
2. 당사자들의 주장
원고는, 이 사건 문화재는 구 회암사 소유의 것이며 원고는 구 회암사와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사찰이므로 위 문화재는 결국 원고의 소유라고 주장하면서 그 확인을 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는 조선 후기에 완전히 폐사된 구 회암사와 관련 없이 최근에 새로이 만들어진 사찰이므로 구 회암사와 연관되어 있는 이 사건 문화재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고, 다만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1 기재 물건에 대하여는 원고의 소유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피고 양주시는, 사실관계나 법적절차에 따라 원고 또는 피고 대한민국의 소유로 될 이 사건 문화재에 대하여 자신이 그 소유자임을 주장한 적도 없다면서 자신에 대한 이 사건 소가 부적법하다고 주장한다.
3. 판단
가. 이 사건 소 중 부적법한 부분
(1) 피고 양주시에 대한 소
피고 양주시는 이 사건 소송에서 이 사건 문화재에 대한 원고의 소유권을 다투지 아니하므로 피고 양주시에 대한 소는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
(2)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소 중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1 기재 물건에 대한 부분 피고 대한민국은 이 사건 소송에서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1 기재 물건에 대한 원고의 소유권을 다투지 아니하므로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이 사건 소 중 위 부분은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
나. 원고와 피고 대한민국 사이에 있어서,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2 내지 5 기재 물건 및 이 사건 제2 문화재에 대한 소유권확인청구에 관한 판단
(1) 사실관계
갑 제4호증의 일부 기재 및 갑 제6, 7호증, 28 내지 41호증의 각 기재 및 이 법원의 현장검증결과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다음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① 구 회암사는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 소재 천보산에 고려 중기부터 존재하였던 사찰로 고려 말 인도 출신의 승려 지공선사가 내방한 적이 있으며 그 제자인 나옹선사[1]가 불사를 크게 일으킨 바 있고, 그 후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무학대사[2]를 머무르게 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구 회암사는 역사적으로 위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② 구 회암사의 물적 시설인 보광전 등 각종 건물은 소실되었고(그 시기나 원인에 관한 정확한 문헌 등의 자료는 없으나 병자호란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사건 사찰부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기 전에는 소실된 건물터 위에 상당한 정도의 퇴적(지표층 외에 황색 모래층 10~20㎝, 흑갈색 내지 사질점토부식토층 10~20㎝)이 이루어지고 수목이 우거진 곳도 있었다. 그러나 당간지주, 석축 등이 지표상에 군데군데 노출되어 있어서 그 곳이 구 회암사의 건물 등이 있었던 절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③ 원고는 이 사건 사찰부지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영성전, 대웅전 등의 건물을 소유, 유지하면서 불교 의식의 거행, 포교 및 수행활동을 하고 있으며 위 영성전에는 구 회암사의 삼화상(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원고의 물적 시설인 위 영성전, 대웅전은 구 회암사 삼화상의 부도를 수호하면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암자를 개축하거나 그 암자 터 옆에 신축한 것이다. 구 회암사가 있던 천보산 일대에는 구 회암사에 딸린 암자 터로 보이는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④ 원고는 이 사건 사찰부지의 토지조사부상 사정명의인이다. 원고는 이 외에도 천보산 일대의 많은 토지에 관하여 사정명의인이 된 이래 계속하여 그 등기명의자로 되어 있다. ⑤ 원고는 오래 전부터 선각왕사비(보물 387호), 회암사지부도(무학대사 부도임. 보물 388호), 회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389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 문화재 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 문화재 50호), 무학대사비(경기 문화재 51호), 회암사지 당간지주(향토유적 13호) 등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와 관련된 유물을 포함하여 구 회암사의 유물을 상당 부분 보유하여 왔는데 피고 대한민국도 위 물건들이 원고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있다. ⑥ 구 회암사 터로 확인되어 발굴이 이루어지는 토지 중 원고 소유의 토지가 3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중 상당 부분(토지조사부에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의 명의로 사정된 부분)도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이 묘지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구 회암사 내지는 원고가 이를 소유, 점유하고 있었다. ⑦ 고려, 조선시대 불교는 선종과 교종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원고가 속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은 위 양종의 전통을 모두 이어 받아 그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구 회암사는 고려 말기 이래로 계속하여 조계종에 속하여 있었다.
(2) 판단
위 인정 사실에 이 사건 문화재가 구 회암사가 번창했을 당시인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의 물건인 점(다툼 없음), 그 종류가 괘불대, 청자, 백자, 향로, 접시 등으로 사찰의 의식이나 수행 및 생활에 필요한 물건인 점, 원고가 위와 같이 이 사건 사찰부지를 사정받고 오래 전부터 선각왕사비, 석등, 당간지주, 삼화상 부도 등에 대하여 소유권을 행사해 온 것이 누구로부터 매수하거나 증여받은 등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 회암사와의 동일성 내지 그 계승자임을 사회적, 지역적, 문화적으로 승인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이는 점 등을 보태어 보면 이 사건 문화재는 구 회암사의 소유로 추인되고, 구 회암사는 그 인적, 물적 시설 등의 규모 내지 세력에 있어서 종전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어 있으나 최소한 사찰로서의 인적, 물적, 의식적 요소를 구비한 채 면면히 존속하여 원고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와 구 회암사는 동일한 사찰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학술논문인 을 제2호증(한국불교사에 있어서 회암사의 중요성과 국제적 위상), 제3호증(회암사의 건축사적 조명)에는 구 회암사가 조선 후기에 폐사하였다는 내용의 언급이 있으나, 같은 논문에 의하더라도 구 회암사가 폐사되었다는 시기에도 부도를 수호하는 암자가 남아 있었던 점(암자가 있었다는 것은 승려 내지 신도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위 논문이 구 회암사의 폐사 여부를 주된 논제로 다룬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나오는 ‘회암사의 폐사’라는 표현도 구 회암사가 사찰로서 기능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의식적 요소가 전부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 회암사에 속한 주요 건물 등이 소실되어 건물터만 남아 있는데 장기간 원래대로 복원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 일시적으로 사찰의 주요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소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부 건물이나 장소가 남아 물적 요소가 최소한으로나마 유지되고 인적구성의 연속성이나 교리, 법통 및 의식의 동일성을 통한 사찰의 계승{승려 집단의 오랜 전통에 기하여 스승과 제자를 통하여 위와 같은 인적구성이나 법통 등의 연속성이나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을 불교계에서는 '사자상승(師子相承)'이라고 한다}이 인정될 수 있는 점, 갑 제40호증의 기재에 의하면 1821년경 이응준이 지공선사비와 무학대사비를 훼손한 일이 있었는데 1828년경 승려 등에 의하여 이를 복원하는 작업이 있었던 점(조선 후기에도 구 회암사와 관련된 승려 내지 신도가 존재하였다는 방증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의 조계종이나 다른 종단을 통틀어 보아도 원고 이외에 구 회암사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볼 만한 다른 사찰이 없고 이 사건 문화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다른 사찰도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위 증거들만으로는 위 인정을 뒤집고 구 회암사와 원고가 동일한 사찰이 아니라고 단정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이 사건 문화재는 결국 원고의 소유라 할 것인데(우리나라에 근대법적인 개념인 소유권이나 권리의무 등의 체계가 도입되던 시기인 토지 사정 당시에 원고가 이미 권리의무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상태에서 앞서 본 바와 같이 구 회암사의 주요 건물들이 있던 곳의 토지를 사정받아 소유권을 취득하였음은 물론 구 회암사의 소유로 추인되는 삼화상의 부도, 석등, 당간지주 등 지상에 노출된 문화재들을 소유자로서 지배해 온 점과 위와 같은 사정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점, 구 회암사와 법적 또는 종교적 성격이 전혀 다른 자가 매매 등에 의하여 이 사건 사찰부지를 취득한 경우와는 달리 이 사건의 경우에는 구 회암사와 동일성을 갖거나 그 계승자의 지위에 있는 원고가 매매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사유로 이 사건 사찰부지에 관한 소유권을 취득한 점 등을 종합하면, 비록 이 사건 제2 문화재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지 않아 그 물건들에 대하여 원고가 그 동안 현실적, 구체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여 오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원고의 소유권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고 대한민국이 이를 다투고 있으므로, 원고로서는 그 소유권확인을 구할 이익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문화재에 대하여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사실관계 및 판단 이유에 의하여 원고에게 그 소유권이 인정되는 이상 이 사건 제2 문화재 중 1 내지 30 기재 물건에 대하여 이루어진 국가 귀속처분은 그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여 무효라고 할 것이어서 원고는 위 물건들에 대하여도 역시 소유권확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4. 결론
따라서 이 사건 소 중 피고 양주시에 대한 부분 및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1 기재 물건에 대한 부분은 부적법하므로 이를 각 각하하고, 원고와 피고 대한민국 사이에 있어서 이 사건 제1 문화재 중 2 내지 5 기재 물건 및 이 사건 제2 문화재는 원고의 소유임을 확인한다.
1) 고려 말의 명승으로 본명은 혜근(慧勤:1320∼1376), 호는 나옹(懶翁), 강월헌(江月軒)이다.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회암사에서 수도를 하고, 1347년(충목왕 3)에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指空禪師)에게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1358년(공민왕 7)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다가 1361년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고 신광사(新光寺) 주지가 되었다. 1365년(공민왕 14) 회암사의 주지가 된 이후 10여 년 동안 여기 머물면서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시켰다. 1376년(우왕 2), 1년 전에 들어간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는데, 부도는 그해 9월 16일 그가 오래 머물었던 회암사에 세워졌다. 시호(諡號)는 선각(先覺)이다
2)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로 속성은 박(朴), 이름은 자초(自超), 호는 무학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小止)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용문산 혜명(慧明)에게서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공민왕 2) 원(元)의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356년(공민왕 5)에 귀국하였다. 1392년 태조에게 불려 왕사(王師)가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죽었다
인용 조문
-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제48조